카테고리 없음2020. 11. 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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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 (간단하게 말하면, '세상'과 '나'는 하나라는 의미.)

 

-> 범 : 우주 / 아 : 나  ==> 우주와 나는 하나 이다

-> 이세상 우주 포함 모든것은 하나이다. 

-> 빅뱅 : 우주만물은 한점에서 시작해 한순간에 폭발해 시간과 공간 물질을 만들 었다

     --> 최초에 물질은 수소와 헬륨 -> 남과여 -> 2가지 물질에서 모든것이 태어 났다

 



애당초 '나'란 없고 '범아일여'가 현실인데, 인간들은 '나'자신에게만 집착한다는 비판이죠.
잘못은 우리들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범아일여의 시각으로 언제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개체적 나,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고통도 없어질 것이며,
나고 죽는 존재계 자체도 '신의 섭리'에 따라 그렇게 있을 뿐인 것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비관론에서 벗어나서,
나와 남의 상생을 도모하는 (왜냐면 '범아일여'라는 통찰에 의해 그 둘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보다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명상해야 할 것은 죽음과 무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범아일여 즉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는 것,
혹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유기적 관계에 의해 거대한 전체를 구성하는,
그 전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체들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삶의 실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여야 할 것이다.

  

* 윤회사상과 해탈.

 

※ 윤회사상 : 輪廻=(바퀴가 돌아가듯이)차례로 돌아감.윤회 生死의 준말.
사람의 살고 죽음이 모두 영혼의 윤회에 의한다는 말(학력개발사 국어사전).
윤회 사상의 원조는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경 우파니사드에 있는 것을,
5세기 경 같은 시기인 불교와 자이나교가 받아들인 사상입니다.
참고 ) 인간이 죽어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하고
            짐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환생이라고 합니다.



※ 해탈
해탈은 세상의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속세의 욕심과 번뇌에서 깨달음을 통해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의 경지 입니다. 즉, 자면서도 깨어있으면서도 죽어서도 항상 깨달은 그 상태 그대로 입니다.
참고 ) 열반.
열반은 부처의 경지가 된 후, 죽을때 육신을 벗어나 더 이상 육도윤회를 하지않는 상태가 될 때를 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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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ream Come True
카테고리 없음2020. 11. 7.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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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열반과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열반과 해탈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근본경전에 의하면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열반과 해탈은 말의 뜻에 차이가 있습니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는 ‘nibbāna, nirvāṇa(sk.)’를 번역한 것이고, 해탈은 ‘벗어났다’는 의미의 ‘vimokkha, vimokṣa(sk.)’를 번역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열반은 세상을 불태우는 삼독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해탈은 구속이나 속박의 수만큼 많지만, 크게는 욕탐에서 비롯된 번뇌(煩惱)로부터의 해탈과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이 있습니다. 
전자를 심해탈(心解脫)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혜해탈(慧解脫)이라고 부릅니다.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계정혜 삼학을 수행하여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다 갖춘 해탈을 구해탈(俱解脫)이라고 하며 이들을 삼해탈(三解脫)이라고 부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열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해탈을 성취한 것을 말하고, 
해탈은 수행을 통해 번뇌가 소멸될 때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해탈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란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무덤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일 따윈 중요하지 않다. 매일 밤 자기 전 우리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
해탈한 사람에게 죽음은 고통과 좌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세요. 그건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사는 겁니다.”
이와 같이 생사에서의 해탈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선택의 가능성이 단절된 죽음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사해탈입니다.

이러한 해탈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오온이나 육입처가 허망한 망상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생사는 허망한 망념을 자신의 존재로 착각하는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 욕탐을 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욕탐에서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 결박되지 않으면 마음이 자신의 존재를 취착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렇게 허망한 존재를 취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편 열반의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의 세계를 떠나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는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有無)의 모순 대립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法界)입니다. 
이러한 법계에서 우리는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법신(法身)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그치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願)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 성취한 법신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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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ream Come True